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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조나단 길프 씨의 허무한 인생

동화: 조나단 길프 씨의 허무한 인생

2012/07/05
짜라일기(독서일기)

꿈을 낚는 마법사 | 미하엘 엔데, 역:서유리 | 노마드북스 | 2005-10-25 | 152쪽
Tro"dekmarkt der Tra"ume | 1986년

꿈을 낚는 마법사 P.12
조나단 길프 씨의 허무한 인생

조나단 길프 씨는 태어나자마자 생각했다.
먼저 자신에게 세상에 태어날 것이지 아닌지를 물어봤어야 했다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원래 이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길프 씨는 혼자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런 질문에 대뜸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답하지는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경솔한 그 한 마디가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단념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돌멩이는 땅에 떨어지지. 불은 뜨겁고 물은 축축하지. 그리고 검은색은 흰색이 아니지.
그래 그런 건 다 좋아. 하지만…….
이 세상이 아닌 또 어떤 다른 세상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예'라고 도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더 나은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나단 길프 씨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갔다.
하지만 조나단 길프 씨의 이런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 일단 방관하면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뭔가 결정 내리는 것은 모조리 피했다.
또다시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갔다.
"좀 더 기다려보자구. 기다려보자구."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이 세상에 서로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어떤 사람을 미워한 적도 사랑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겐 너무나 무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설령 어떤 여자가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해도 나는 절대로 '예'라고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되면 혹시 모를 더 나은 다른 가능성들을 단념하게 되는 셈이잖아.
가롤라는 대단한 미인이고 안나는 마음씨가 착하고 또 파울라는 돈이 많은 여자지.
그래, 다 좋아. 하지만 어쩌겠어.
그들보다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말할 수 없어."



또다시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서 쓸쓸하게 살아갔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길프 씨는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기에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한 가지 직업을 결정하면 다른 가능성 있는 수많은 직업들을 포기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한 가지 직업을 정하면 나는 일단 뭔가가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선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수천 가지 다른 직업들을 포기하는 결과가 돼버리잖아.
치과 의사는 이를 뽑고, 제빵사는 빵을 굽지. 그리고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총을 쏘지.
그래 다 좋다구.
하지만 나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놀라운 직업을 가질 수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직업에도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겠어. 뭔가 특별한 직업을 가질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
조나단 길프 씨는 언제나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또다시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갔다.
길프 씨는 여전히 뭔가를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문제에도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달이 바뀌고 또다시 해가 넘어갔다.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길프 씨도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길프 씨는 마지막으로 신의 심판대 앞에 섰다.
이제 그의 공허한 인생도 심판받는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신이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딱하구나, 나의 아들아. 도대체 넌 스스로 결정해서 한 일이 없으니 용서고 뭐고 할 게 없구나. 너 좋을 대로 결정하거라. 그래 천국과 지옥 중 어느 곳으로 가고 싶으냐?"
조나단 길프 씨는 모자를 벗고 이렇게 물었다.
"꼭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나요?"
"……."

'지옥은 뜨겁고, 천국은 평화롭다. 천사들은 인자하고, 악마들은 난폭하다.
그래, 좋아. 하지만……. 어딘가 전혀 다른 어떤 곳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겠어. 어쩌면 더 특별한 곳이 있을지도 몰라.'
조나단 길프 씨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의 세상 속에서도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
천사들은 그에게 그들이 입는 여행복을 입혀주었고 머리에는 후광을 씌워주었다.
그는 결코 자기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종종 쓸데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도 때로는 신의 세상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중 태반은 어떤 것을 선택하면 유사한 결과를 끌어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큰 인생의 길이 90도로 꺾어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큰 각도(예를 들어 30도 이상)로 꺾어지는 결정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선택이 중첩되어 완만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큰 각도를 그리는 결정의 집합도 있다.
100가지 작은 선택이 쌓이고 쌓여,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은 비가 오니까 공부는 밀쳐두고 스타크래프트(컴퓨터게임)나 해야 갰다.' 같은 결정이다. 이런 결정들이 계속 반복되면, 그 시점에선 결정적인 선택이 아니었지만, 몇 년 후에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프로 게이머가 될 수도 있고, 혹은 후진 직장에 다니며,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며, 새로 찾아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수도 있다.

길프 씨 에게 '선택'아리는 단어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다. 유혹은 나뿐 것이며 그것에 빠져 드는 것은 더더욱 좋지 못한 것이다.


선택이야 어떻든 문제는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남들이 하는 것만 따라하고, 나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선택을 쫒기만 한다면 그것이 나의 인생일까?


짜라는 짜라의 인생을 살고 싶다.


길프 씨는 과감하게도 선택하기를 포기했다.
그것은 회피인 동시에 또다른 이름의 선택이다.
"좀 더 기다려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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