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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비이성적 사랑

2010/02/24
짜라일기
독서일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역: 정영목 | 청미래 | 2002
Essays in Love | Alain de Botton | 1993

P.44
4. 이런 비진정성이 꼭 극악한 거짓말이나 과장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클로이가 원할 만한 모든 것을 미리 예상하여, 내 역할에 요구되는 어투로 말하려는 것뿐이었다.
"포도주 좀 드실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요. 포도주 좋아하세요?" 그녀가 되물었다.
"드시겠다면 난 상관없어요."
"좋으실 대로 하세요. 원하시는 대로."
"나는 아무 쪽이나 좋은데요."
"나도 찬성이에요."
"그럼 마실까요, 말까요?"
"어, 나는 안 마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요, 나도 별로 마시고 싶지 않군요."
"그럼포도주는 마시지 말기로 하죠."
"좋습니다. 그럼 물만 마시죠."


음…….

소설이긴 한데, 제목에 '수필'이 들어갈 만하다.
상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말들이 주~~욱 이어진다.

이 책은 "플라톤의 국가" 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읽기가 심히 힘들다.
사람의 감정 상태를 치밀하게 뒤쫓고 있다.
"빨간머리 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나, TV프로 "탐구생활"에서 해설자의 목소리 뭐 그런 생각을 읊조리는 이야기가 어렴풋 떠오른다.


생각의 흐름이 1, 2, 3 숫자로 구분되고, 생각에 주름이 잡히듯 생각이 깜빡거린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의 전개가 거의 없다.
처음엔 "이야기의 전개"가 알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껍질을 아무리 까도 알맹이는 나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 읽었는데, 50쪽 정도 읽으면서 확신을 가졌다.
이 책은 알맹이 없는 껍질뿐인 책이다. 물론 위에서 전제한 "이야기의 전개"를 알맹이라고 했을 때 이야기다.


이젠 알맹이의 기준을 "생각의 흐름"으로 옮겨놓고 읽어보자.
짜라가 보기에 주인공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것도 병적으로.
그것이 사랑인가?
아님 상대를 위한 '배려'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내모습의 '포장'인가?
그 어느 것이든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이 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생각해 봤다.
우선은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서, 인생의 의미를 따지며,
심리학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고.
언어학자가 되어서,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파해 친다.
여기에 극단적인 상상력과 완벽히 새로운 의미부여를 거듭하면서 동시에 현실과의 타협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두 번째로 너무 비이성 적이다.
이성적으로 그 모든 것을 주도면밀히 분석하고 있지만, 한발만 물러서서 보면 '비이성적'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주관이 없다.
모든 것이 임기응변적이며, 최소한 개인적 관점에서도 혼자만의 절대성마저 상실 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집합이 '사랑'이라고 "Botton"은 이야기 한다.


손예진, 감우성 주연의 "연애시대"를 참 재밌게 봤다.
여기서도 이 책과 비슷한 코드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는 무척 재밌게 봤는데, 이 책에서 '답답함이랄까?' 표현하기 힘든 여러 가지 감정이 생기면서 책읽기가 힘들구나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참 재밌게 읽는데, 나만 이런거 보면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면의 무엇인가가 '사랑'의 상세한 이야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10년, 혹은 20년 전 과거의 어떤 기억에 의해 봉인되어 있던 아픔이, "Botton"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깜빡일 때마다,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의 생각을 따라가며 조금씩 "Botton"의 글쓰기에 익숙해지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짜라는 김훈, 이외수작가 같은 사람처럼 글을 쓰고 싶은데, 어쩌면 Botton의 글과 가장 많이 닮은 듯한 생각도 든다.
그래서 힘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