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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2 찢겨진 책장의 가벼움

찢겨진 책장의 가벼움

2012/04/02
짜라일기(독서일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역:이재룡 | 민음사 | 2009-12-24
L'insoutenable legerete de l'etre | 1984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은 전반적으로 걸레에 가까운 몰골이다.
많은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역력하다.
뭐 인기가 많다는 방증이겠지…….


그런데 첫 장을 넘기자, 누군가 검은 사인펜으로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그려 놓았다.
전반적으로 동그라미가 많았고, 더러는 길쭉한 무엇인가를 그렸는데, 출발점과 끝점이 살짝 어긋나 접합 점에서 교차하는 차단된 도형을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어떤 꼬마의 작품 같긴 한데, 이 책이 아동용은 아닌 것 같고…….
누가 이런 무자비한 짓을 했을까?

책을 빌려 보다보면 별의 별 꼴을 다 보게 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내용의 일부를 가슴깊이 받아들였다는 흔적 정도를 남기거나, 좀 더 과감한 독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간혹 적기도 함고, 또 더러는 책 뒷장에 적혀있는 주석 문을 요약해서 옆에다 친절하고 적어 놓기도 한다.
가끔, 아주 가끔 개념 없이 전혀 관계없는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기도 하는데, 아무리 책의 내용과 연관 지어 보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메모도 접하게 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정도로 낙서를 하는 책은 처음 본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짜라를 보며, "그나마 운이 좋으셨군요. 저는 그보다 더한 책들을 수없이 봐 왔죠." 라고 태연하게 살짝 미소까지 지어가며 말 할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책을 보고는 살짝 분노가 일었다.
아무리 자기 책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책에게 무례하게 굴다니,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다.
책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서는 그의 얼굴에 책에 한 것 과 같은 형벌을 내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독서모임 선정도서이니 분을 삭이며 읽어갔는데, 30쪽 언저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30쪽과 33쪽 사이에 찢기고 남은 세로 5cm 가로 1cm 정도의 길쭉한 형태의 조각.
31과 32가 있어야 할 자리에 볼품없는 종잇조각으로 화해있는 책장을 보며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아~ 이런 얼어죽을…….

아무튼 그래서 책읽기를 포기하고는 덮어버렸다.
뭐 한 장 없다고 책읽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책을 읽다가도 잠깐만 한눈을 팔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어느새 방금 읽었던 내용이 차지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잃어버린 숨은 그림 조각처럼- 원래 무엇이 있어야 어울릴지 모를 때가 종종 있는데, 그렇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상념으로 읽었던 두 페이지의 내용이 날아가 버렸거니 치부해도 되겠지만, 일단 상한 마음은 책을 계속 읽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짜라를 눌러버리고, 분노하는 짜라를 어떻게든 달래야 하는 현안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한다.


책을 반납할 때,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겨가며 책의 손상정도를 일일이 감별 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조 외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추적추적 내리를 비와 같은 기분이 되어 생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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