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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30 인생의 마디, 시간의 고고학

Posted 2015.09.30 17:56 by 짜라

2015/09/30 인생의 마디, 시간의 고고학


잘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마디는 사회 통념적 관점과 개인적 의미관점에서 이렇게 9개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의도와 상관없이 이런 인생의 마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이전의 나는 좁은 세상에 살았다. 세상은 내가 중심이었고 내가 없는 세상은 의미를 상실한다. 내 초등학교 시절, 삶의 의미에 천착했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나는 이 우주라는 곳에서 지구라는 별에, 한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다. 이런 정황적 사실들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다. 내가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지금의 내 시점으로 과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서술하고 있다. 나는 알지 못한다. 과거의 내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았는지를, 그래서 궁금해 졌다. 내 생각이, 내가 떠가는 구름을 보며 생각했을 그 생각들을 유추해 본다.

2015년을 기준으로 내게는 또 다른 삶의 마디가 생겼다. 내가 지구에 태어 난 것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시간의 미디이다.

나는 이 마디가 행복하고 즐겁다. 내가 좀 더 성숙한 증거이기도 하고 시간이 준 하나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렵고 또 안타깝다. 바로 직전까지 알고 있던 내가 급격이 변해가는 것이 소중한 생각과 생각의 흐름이, 전에는 이렇게 생각 하던 것이 지금은 저렇게 생각하고, 당연시 생각하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낯선 것이 당연해 보이기 시작하며 변해버린, 변해가는 내가 의식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이 변화의 의식이 가뭇해지며 혼란스러워 진다. 지금의 생각이 현재의 내 생각인지 직전 과거의 생각인지, 그래서 그 생각들이 애틋해진다. 조금은 잃어가는 내 모습들이 안타까워진다. 그 생각들을 정리하여 기록하고 싶다. 전에 그렇지 못했던 내가 못내 아쉽다. 길을 잃어 버린 듯, 과거의 내가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간의 고고학.

지나간 나를 다시 복원하기 위한 고고학인 것이다. 욕심은 과거의 9개 시기를 모두 발굴해 내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탁상공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99%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수준은 어디 까지 일까? 

일단 2015년을 기준으로 나뉜 나의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다. 비록 가물거리고는 있지만 때때로 변해버린 나를 떠올리며 씁쓸함이나 환희를 느껴지는 지금이 그나마 과거 발굴의 적이 이다. 그리고 그 이전을 찾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이렇게 연어들처럼 한단개씩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직전 시간이전으로의 발굴 여행은 시간의 거리 유무와 상관없이 일정한 난이도 일 것 같다. 그리고 그 일정거리를 직선적으로 발굴하는 과정은 사뭇 지루해 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지. 2015년 이전, 다음으로 시간을 한참 거슬러 대학교 시절, 그리고 중학교 시절 까지 올라가 보고 발굴 정도에 따라 다음 발굴 목표를 잡아가는 게 좋겠다.


[인생의 마디들]


초등학교의 나

중학교의 나

고등학교의 나

대학교의 나

초등학교 이전의 나

20대 중후반의 나

30대 초반의 나

30대 중반의 나

30대 중후반의 나


과거 시간의 발굴에 앞서 이렇게 시간에 마디가 생기는 이유를 분석해 보자.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게 졸업이다. 입학과 졸업은 거의 시차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딱 붙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입학보다는 '졸업'이 시간 마디역할로 더 의미 있는 기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물론 시작의 동어인 입학도 의미는 있다.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그 결정들을 하나씩 지켜나가며 나를 더 단단히 새우는 것이다. 이를 잘 관찰 해 보면 선에 마디가 생기기보다는 선의 방향성이 더욱 공고해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방향을 검토하고 다잡고 새우는 과정이랄까 끊어지기 보다는 더 두터워짐을 어렴풋 느낀다. 끝과 같은 졸업은 지금까지 내 일의 결과를 확인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전환이나 도약의 시점이다. 삶의 후회도 있고, 대견함도 있고, 쓸쓸함과 애환도 있다.

가끔은 다음 시작 전에 쉼표를 찍기도 하고 의도와 상관없이 쉼표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단절이 되거나 일탈로 이어져 하나의 큰 전환이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위대한 인생과의 조우는 이런 시점에서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졸업은 '죽음'이다. 바로 인생 졸업인 샘이다. 어느 래퍼의 말처럼 '관 뚜껑이 닫혀야 그 인생을 평가 할 수 있다.'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평가를 하기위해서는 끝이 나야 하는 것이다. 중도에는 아무리 짧은 시간이든 하찮은 사건이라도 그 의미 무게를 측정 할 수 없는 법이다.

가까운 사람의 끝은 경우에 따라서 인생의 마디를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의 끝은 그 의미를 환산하기가 힘들다.

가끔은 사소한 끝이 마디를 만들기도 한다. 길에 서 우연히 목격한 끝은 내가 처한 상황과 결합되어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 전가지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거나 계획 할 수 없다.

사건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생각의 연속된 생각의 흐름을 만든다. 이 생각의 흐름은 의도 될 수 없으며 준비 되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상되지만 그 생각을 하나씩 분리해보면, 일관되어 보이던 생각에 개연성이 없으며 우연히 지배하는 운명 같은 것이 얼굴을 드러낸다. 차가운 날씨가 등장하는가 하면 변덕스런 햇살의 강렬함이 생각을 이끌기도 하고, 잔잔한 바람이 일으키는 풀들의 술렁임의 군무가 전혀 다른 상념의 우물에 빠뜨리기도 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람과 조우하여 잊고 싶던 사건의 봇물을 터뜨리기도 한다. 시작이 무엇이든 그것과 상관없이 일정 조건만 주어지면 실행되기를 기다리던 준비된 생각들도 더러 있다. 사무치는 설움을 소리 내어 곡하는 와중에도 그 의미는 대상의 영역을 벗어나 유령처럼 떠돌기도 하고 방향을 상실한 슬픔은 보지 못한 내면으로 이끌기도 한다. 삶은 결들을 하나씩 일으키며 각기 다른 생각들을 흐름처럼 강물위에 풀어 놓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들은 조건이 주어졌을 뿐 어떤 방향으로 향 할 지 인수 없는 수많은 조건들에 의해 우연처럼 운명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앞뒤를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우연도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것이다.

다람쥐의 바삭임, 풀벌레의 통곡, 바람의 흔들림, 낙엽의 춤, 풀숲의 합창, 어둠의 진군, 떠도는 상념의 속살거림, 강위에 뜬 달의 일렁임. 이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하나의 일관되지 않은 생각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비, 밤하늘을 밝히는 번개.


운명처럼 다가오는 '만남'.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마디는 만남이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만남은 연인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이 사랑으로 발전하면 그 만남은 전의 나와 지금의 나로 완전히 분리되고 사랑이 깊을수록 그 구분의 정도는 분명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의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상실을 격기도 한다. 상실을 눈치 채지 못한 체, 시간이 흐른 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상실을 눈치체고 당황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혼란과 후회가 뒤따르기도 한다.

'사랑'은 무서운, 무섭도록 가혹한 인생의 마디이므로, 그 의미는 꺾어진 가지의 마디처럼 유난히도 붉어져 나와 전 후의 기억의 시간 감각을 아련하게 만들어 버린다.

대부분의 사랑은 달콤하기 보다는 슬픔과 분노, 아련함을 동반한다. 사랑에 끝이 정해져있으며 그 대부분은 극단적이다. 용기라는 양날의 칼을 뽑아드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결말이 비극임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 결말을 가능한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의 또 다른 속성이다.


'인생선배'와의 '만남'도 빼 놓을 수 없다. 사랑과는 달리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는 특성이 있지만, 대게의 경우 나이가 많고 인생경험이 풍부하다.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선배, 상사가 되기도 하고, 한때연인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나'에게 깨우침을 주며 삶에 의미를 되짚게 하며,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일차적으로는 가치 기준과 생각이 바뀌고, 다음으로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주위사람들이 내 인생마디의 존재를(발생을) 의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 시키며 인생 마디의 탄생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렇게 인생의 마디는 외부 상황과 조건에 좌우 되며, 원인이 한가지인 경우도 있지만, 수십, 수백 가지 원인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하기도 한다. 결국 인생의 마디는 내의지 보다는 우연에 더 의지 하며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인생의 마디 발생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다음으로 인생의 마디가 미치는 영향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마지막엔 발생 그 이후까지 짚어보려 한다.



인생의 마디 발생은 생각의 차원 하나를 더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기존의 생각을 하는 차원을 '치환'해 버리는 경우가 있고, 기존의 차원에 하나를 오롯이 '추가'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중간쯤 위치에 새로운 차원이 추가되나, '기존 차원에 기생'하는 형태로 가지처럼 뻗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씩 들여다보자.

생각의 차원이 추가된다는 것은 데카르트 2차원 좌표공간에 Z축이 추가되는 것과 같다. 동일한 문제를 3차원공간에 투영시키면 복잡한 문제가 간단해지기도 하고 단순한 문제를 번거롭게 만들기도 한다. 또는 기존의 단순한 문제에 새로운 통찰을 주기도 한다. 차원을 넘나드는 생각의 과정을 통해 복잡한 문제를 명징하게 만들어 핵심에 쉽게 다가가게 할 수도 있다.

'생각의 차원이 추가'되면 기존에 생각하던 방식으로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내가 하고 싶었던 모티브)

어항 속 물고기를 보고 이전에 했던 생각과 이후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병아리를 보고 어린이와 어른이 생각하는 관점이 완전히 다른 것과 같이 말이다. 귀엽고 앙증맞고 품어주고 싶던 것이, 관리가 어렵고, 죽을 지도 모르며, 후유증이 트라우마를 만들 수도 있음을 안다. 다 큰 닭을 잡아먹을지, 팔아버릴지, 살아있는 생명에 끝을 선언할 용기가 있는지 자문한다. 병아리 감별사와 경제적 효과 한국의 치킨집의 달들이 이 병아리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질지 끊임없이 유추한다.


'문제'는 차원이 추가됨과 사유의 깊이가 달라지면서 전과 후의 생각이 단절된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단절은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와 인지의 과정까지 진행되지 않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졌지만 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나'라는 존재는 지금과 같이 일관된 생각과 결론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다른 사람이 왜 그렇게 말 했는지, 혹은 행동했는지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과거의 '나'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런 혼란은 큰 문제를 야기하여 내적 혼란을 유발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의기소침이나, 소극적, 자아 흔들림, 혹은 정신적 질환으로 발전 될 수도 있다.

나의 이런 불일치는 '성장통'이라 불리기도 한다. 

차원이 추가되기 전의 '나'를 온전히 불러들일 수 있을까? 혹은 추가된 차원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추가된 차원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발생시킬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다보면 전의 '나'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보는 관점, 사랑, 용기, 송공, 정의, 편안함, 꿈, 좌절, 아름다움, 진리, 선, 악, 소통, 평범, 특별함.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짚어 봄으로써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평가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겠다. 시간의 고고학 적 발굴을 통해 과거의 나를 온전히 되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의 '나'가 가진 어려운 욕심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그때의 내가 거쳐 온 모든 사건과 생각들을 기억하고 이해한다면 쉽게 반목과 갈등들을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부모와 자식은 행복해질 것이다. 미래라는 이름의 욕심을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차원이 치환되는 경우'는 이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또한 추가되는 경우보다 훨씬 혼란스럽다. 그 원인을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거니와 내 안의 낮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이게 '나'인지, '나'였는지 '나'가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확살 한 건 이 모두가 '나'라는 것, 그것뿐이다. 내가 '내' 눈치를 봐야 하며 살얼음판 같은 변덕의 드라마를 라이브로 시청해야 한다. 마음의 '사춘기' 라고나 할까? 이전의 무의미한, 사소한 것들이 대단한 의미를 가지며, 가공할만한 공감능력을 가지게 된다. 눈이 내리는 느낌, 흔들리는 낙엽, 놓쳐버린 버스, 도로에 깜빡이는 신호등, 줄지어선 개미, 하늘의 구름, 물위의 먼지, 오리가족, 차창에 비친 내 모습, 아버지의 뒷모습, 구멍 난 양말, 발뒤꿈치, 떨어진 신발, 발에 채인 자갈돌, 내리는 비.

이런 경우 이전의 '나'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변화된 나를 인지하기 힘들 뿐더러. 전후의 나를 구분하는 것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회피하고 싶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고, 뒤돌아 보고 싶지 않다. 이  시련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한편으론 이런 나를 즐기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불가능은 사전에 적힌 단어일 뿐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희극과 비극의 종합이다.


'기존 차원에 가지치기'를 한 경우는 비교적 인지하기 쉽다. 퀀텀 점프, 도약, 성숙, 등의 관용적 표현이 있다. 몸통만 있던 생각에 팔이 돋아난 듯, 답답하던 생각에 자유로운 응용과 확장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경우는 인지도 쉽지만 전후의 나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 또한 비교적 용이하다. 물론 보통의 경우 이를 구분해서 유추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상대 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도약(추가, 치환, 가지) 중에 가장 쉬울 뿐. 여전히 인지와 구분은 어렵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른이 사춘기 청소년을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장의 뿌듯함과 성취감, 자신감, 긍정적적인 감정이 무지개처럼 마음을 충만히 채우며 가장 창의성이 돋아나고 가속도가 붙듯 연속적으로 유익한 일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기간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예고 없이 불현듯 다가온다. 사람에 따라 길수도 짧을 수도 있다. 지나고 나면 어렴풋 성장을 완수했음을 알 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지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공언 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 도약의 느낌을 유추하며 되새김질하면 도약의 여운을 좀 더 끌 수 있으며 혁신적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집착 하게 되면 해어날 수 없는 늪에 바지는 것과 같이 점점 기운이 빠지며 빈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열정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만다.


이렇게 3가지 형태의 차원추가를 격고 나면 이젠 지금의 나와 이전의 '나'를 의식하여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의도적으로 분리해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해 그 감정을 유추해 보는 것과 같은 다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이전의 나를 지금의 '나'가 이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불행이자, 비극이다. 이해 받지 못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은 타자의 둘레 속에 또 다른 타자의 무리를 형성하며 '나'를 방어할 필요성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인생 군상들을 이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버리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위의 '인생의 마디' 때문이다. 과거의 여러 '나'가 타자 화 되어있고 그런 '나'들이 살아가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타자의 무리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박에 없다. 우리가 그 타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면 삶의 의미 또한 포기 하는 결과로 이어져 "나는 왜 숨 쉬는가?", "이 생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없게 된다.

불편하지만 이것은 진실이며, 이런 노력이 인생에 통찰력을 길러준다. 건강한 정신을 성장시키고, 강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안타깝다. 차원 도약이 2015년에 있었고 그 변화를 어렴풋 감지했다. 이전의 '나'를 찾고 싶고 애틋한 그 감성을 잊지 않고 싶다. 삶의 시야가 넓어져 더 많은 사람이 보이게 되었지만, 좁은 시야의 '나'가 생각하던 방법을 떠올 릴 수가 없다. 그게 안타깝다. 

너무 희미해서 그 변화의 마디를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정확히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을 것만 같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삶의 시간 마디 발굴 작업을 시작 하려 한다.


세월이 흐르면 차원이 하나씩 늘어나 생각의 고려 대상이 점점 커져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을 줄이게 되지만, 동시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점점 줄어들게 된다. 평범한 남들이 다 아는 누구나 그렇게 할 것 같은 무난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 경험은 악습이 되고 시행착오를 거쳐 불필요한 지연 요소를 버리는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 만약 이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되면 큰 공경에 처하게 되어, 시련과 공경에 처해져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숙제를 풀게 된다. 그래서 혁신은 삶의 차원이 3개에서 4개정도 일 때 일어나며 너무 적거나 많은 경우에 혁신에 실패하게 된다.


삶은 물레방아처럼 돌고 역사 또한 지구가 태양을 돌듯 돈다. 태양이 은하계를 중심으로 돌고 은하가 우주를 중심으로 돈다.

우리가아무리 앞으로만 향해 곧게 나아가려 해도 물레방아처럼 다시 돌아 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사이래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견할 뿐이다.


차원이 많아지면 생각하는 것에 고통이 따른다.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다 고려 할 수 없고 그래서 미숙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찜찜함이 남는다. 모든 것을 고려해 넣지 못한대 대한 자책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지면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린다. 타성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생각할 힘을 잃어버리면 한 편으론 편안해 진다. 고민할 필요가 없음으로 일시적으로 걱정도 사라지게 된다. 걱정 할 일이 생겨도 걱정(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생각을 대신하게 되어 수동적인 결정을 발생시켜 생각을 한 것과 비슷한 결론이 나게 된다.

이전에는 생각, 결정, 의지, 노력이 뒷받침되었지만, 환경, 시간, 조건, 우연들이 예측 불가능한 결론을 이끌었다면, 생각하지 않는 지금은 후자의 것들만이 작용되어 결론을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 차이는 크게 없어 보인다. 순리대로 되어가는 듯, 편안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원인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려하면 할수록 알 수 없고 머리만 아파온다. 자동화된 타성적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터 혼란과 공포와 무기력함과 좌절이 몰려온다. 점점 실체에 다가갈수록 알고 싶지 않았던 내면과 조우하게 되며 황패해진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제 3의 갈등요소가 등장하는데 지금껏 생각하지 않고도 잘 살았다는 증거와 현실 앞의 무기력한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불편함이다.

안주하는(생각하지 않는) 삶은 도전하는 삶에 걸림돌이 된다. 반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생각의  삶들이 많아지면 결국 사회는 정체되어 돌이키기 힘든 하나의 벽을 만들게 되고 열정과 혁신으로 가득한 젊음 앞에서 넘어서야만 하는 관문이 된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을 때 이를 넘어서려 노력하면 결국 내가 만든 벽과 싸워야 하며 이겨봐야 득 될 것 없는 결과를 쟁취하기 위해선 신념이라는 갑옷으로 무장을 해야만 한다. 만약 그것에 승리를 거두어 벽을 뛰어 넘으면 우리는 도약할 것이고 새로운 생각의 차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시 알 수 없는 혼란이 '나'를 감싸듯 품는다.

변화된 것은 나 말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세상이 '나'를 다르게 봐주진 않는다. 나는 증명해야할 의무를 느낀다. '나'라는 미래의 '나'가 현재로 부터 태어나 분리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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