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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후회를 남긴 모로코의 아침

2009/05/06 짜라일기
후회를 남긴 모로코의 아침.


모로코의 아침.

테스트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챙겨서 발리마 호텔 옥상으로 향한다.
하나 둘 장비들이 자리를 잡고, RF 상태를 점검한다.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대략 준비가 끝나고, 사업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 구름 한 점 없는 오전의 태양, 그 열기. --;
햇살이 뜨겁다.

아래위로 검을 옷을 입어서 그런지, 옷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살마저, 얇은 외피를 뚫고 피부를 자극한다.
상의 반팔 옷에, 드러난 양 팔은 따가운 햇살의 정도를 몸으로 실감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잠시 팔을 가릴 수 있는 외투를 가져와 입을 까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더운 날씨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이전에 떠올랐던 생각은 구겨서 던져버린다.
30분 간격으로 그렇게 버려진 생각들이 주위를 나뒹굴며 짜라를 산만하게 한다.

테스트는 지루하게 이어졌고, 잠깐씩 현기증이 이는걸 느꼈다.
역시나 건물 안에서 자판만 두드려 대던 직업답게, 저질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름 운동도 하며 몸 관리를 했었는데, 지금은 이런 저런 핑계들로 방벽을 새우고 아무 일 없는 양 건방진 태도를 유지한다.
뿌린 만큼 거둔다고 했다.
속담은 여지를 두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인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 번도 그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잘하는 것이 있을 뿐 더 잘났다고 나서기엔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상황이란 변수는 그 차이를 좀 더 극명하게 나타내어 보여준다.
변수라고 언급했듯이, 상황은 시시때때로 변하며 그에 따라 우열 또한 극명하게 갈라놓는다.
지금은 짜라의 장점을 살리기에는 불리한 조건이다.
꼬리를 내려야 할 시점인 것이다.
대지의 건조함은 더욱 짜라의 목에 창검을 드리운다.


여태까지가 외부의 공격이었다면, 이번엔 내부의 반란?

허기가 느껴진다. 세 번짼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준비를 했다.
사실 좀 더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면, 아침이야 먹었겠지만 점심도 먹지 못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무수히 있었음에도 안이했다.
벌써 12시를 지나고도 한 시간이 더 흘렀다.

아무도 점심식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저들도 내란을 억척스럽게 막아가며, 죽을상을 하고 서있다.

14시.
아직도 3시간은 더 해야 겨우 한 가지 테스트를 마무리 할 수 있는데, 사업자 쪽 담당자가 다른 테스트는 이틀 뒤 금요일로 미루자고 한다.
테스트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부터 그렇게 이야기는 했었지만, 그래서 점심도 없이 이렇게 힘겨운 사투를 벌였건만…….
두 손을 들어 으쓱해 보일 뿐이다.
왼지 비협조적으로 느껴진다.
빨리 할 수 있는 일도, 일부러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마무리 하지 못한 시험을 끝내고, 식사를 한 뒤 호텔방에 쓰러졌다.
아무것도 하기가 귀찮다.
뜨거운 태양을 뒤집어쓰고, 더하여 먼지바람도 뒤집어 쓴 뒤라 씻어야겠다는 마음의 상념이 일렁였지만, 그 상념은 소리도 없이 밀어닥친 눈꺼풀의 습격에 일순간 꺼져 버렸다.


3시간쯤 그렇게 쓰러져 있다, 번쩍 일어나 소설책(강철의 열제 14권)을 읽는다.
책을 읽다, 감동에 눈물 콧물을 쏟다가 어느 순간 입 꼬리가 흔들리더니, 입모양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처절한 슬픔과 감동은 눈에서 시작해 눈물을 타고 흘러내려 코를 자극하고,
콧물을 동반한 감정은 또다시 흘러내려 입 꼬리를 잡아당긴다.
그렇게 들썩 거리던 입 꼬리는 종국에 참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켜 입모양마저 일그러뜨린다.
처절한 슬픔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처절한 슬픔을 옆에서 관찰 하고 있다.
슬픔과 오열에 극한은 입에서 나오는 것인가?

두 장 정도를 읽고서, 샤워를 한다.


역시나 우려했던 상황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타났다.
양팔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양팔은 오전의 태양빛을 온전히 머금고 쏟아지는 빗방울 속에서도 눈에 보일 듯 한 열기를 내뿜고 있다.
화상.

어디선가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녀석 모로코 가서 피서한번 재대로 즐겼구만, 피부가 구릿빛이야."


온몸을 감싸는 촉촉한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속에 서있는 짜라를 본다.
반팔 옷이 있었을 법한 자리를 기준으로 빛의 경계가 생겼다.
아침에 떠올렸던 생각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맹렬하게 일어나 꾸짖는다.
내 말을 무시했을 때 이미 이런 상황은 예상했었다고.
검붉은 팔을 조심스럽게 닦아내지만 태양의 열기는, 그런 조심함에도 가녀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기념촬영.

카메라를 들고 와 고통의 증거를 사진 속에 갈무리한다.
이로써 10년 후에도 기억 속에 잊혀지지 못할, 모로코에서의 하루가 기록되었다.
오늘의 처절했던 후회를 일기 속에 기록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화상에는 알로에가 최고라는데, 모로코 구시가지 시장에 가면 구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