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9 짜라일기: 크레파스와 꿈
『포구기행』 - 거차에서 꾸는 꿈
143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꿈은 열여덟 가지 색을 지닌 크레파스를 갖는 것이었다. 이 꿈은 그 무렵의 내게 좀 과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2학년의 우리 반에서 그런 크레파스를 지닌 아이는 아버지가 의사인 한 아이뿐이었다. 145 중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조숙하게도 한 여자만 사랑하다 세상을 뜨는 것이었고, 대학시절엔 여기저기 길 위를 떠돌아다니며 시를 쓰다 어느 눈 많이 내린 겨울날 눈 위에 쓰러져 얼어 죽는 낭만적인 것이었다. 그 후로도 내 꿈은 많았다. 섬진강변에 작은 움집을 짓고 나룻배의 뱃사공이 되고 싶은 꿈을 꾸었는가 하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펼쳐진 산골 마음을 도보 여행하는 꿈을 지닌 적도 있고,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부처님과 한 5년만 열애하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 나오고 싶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꿈을 꾼 적도 있다. 어제 회사 비품고에서 Index 테이프를 찾다가, 크레파스를 찾았다. 이걸 누가 쓰기에 비품고에 있을까? 생각을 한다. 그러다 나도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봤던가 생각을 한다. 분명히 어렸을 때 그렸을 텐데, 기억이 없다. 한 번도 그린적인 없나? 있나? 어슴푸레하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지 하면서, 딱 두 세트 있는 크레파스 한 세트를 가지고 책상 구석에 올려놨다. 쓰고 남은 이면지에 일자로 그어내려 본다. 크레파스의 거칠은 질감이 종이에 묻어난다. 크레파스상자 위에는 핑크색 디자인에 하얀 토끼가 까만 눈을 세로로 길게 반짝이고 있다. 크레파스의 질감이 어렴풋 기억난다. 이걸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당연한 질문을 떠올려 본다. 오늘 아침 서제에서 포구기행을 읽는데, 저자의 어릴 적 꿈이 열여덟 가지 색 크레파스라고 한다. 짜라는 그 작가의 꿈을 어제 우연치 않게 이루었다. 그때는 무심히 봐서 몰랐는데, 사무실에서 몇 가지 색인지 새어보니 딱 열여덟 색이다. 이런 것이 어릴 적 꿈이구나. 어떤 이의 꿈이었던 크레파스가 이전보다 더 소중해 보인다. 곽재구씨의 꿈은 특이하다. 그러고 보면 짜라의 꿈은 저자의 꿈보다 더 두리뭉실하다. 전국 일주하기, 세계여행하기. 태권V 만드는 과학자 되기. 오토바이로 여행하기. 한적한 곳에 직접 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살기. 그리고……. 더 많을 탠데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루지 못했던 꿈들만 생각나는 것 같다. 이미 이루었던 꿈들은 이젠 꿈이 아니기에 기억에서도 지워져 버린 거겠지. 꿈들을 기록한 꿈에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창업하는 것이 꿈이다. 책을 쓰는 것도 꿈이다. 위에 나열한 것들도 지금 꾸고 있는, 이전에 꾸었었던 꿈이다. 꿈이 꼭 한 번에 한가지 일 필요는 없으니.
한 여자만 사랑하다 세상을 뜨는 것.
여기저기 길 위를 떠돌아다니며 시를 쓰다 어느 눈 많이 내린 겨울날 눈 위에 쓰러져 얼어 죽는. 곽재구씨의 꿈은 생의 마감까지 이어지는 꿈들이다. 한 여자만 사랑하다 세상을 뜨는 꿈은 영화 같고, 시를 쓰다 눈 위에 쓰러져 얼어 죽는 꿈도 영화 같다. 시인은 영화같이 살고 싶은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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