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8 짜라일기: 수로와 개울 논쟁 부제: 원수진 단어들: 도랑, 개울, 수로 요즘 K와 점점 친하게 지낸다. 늦은 시각 전화 통화를 시도한다.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이야기로 서로의 영혼을 고양시킨다. 얇고 투명한 막에 쌓인 듯 가뭇한 힘겨루기로 조금의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 보고 누구의 그림이 더 좋은지 비교 하기도 하고, 혹은 물감을 너무 많이 썼는지 터치가 너무 깊은지 선이 지나치게 상투적인지에 대해 평을 하기도 한다. 가끔은 천박하고 저속한 단어를 이용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하고 이야기에 이음줄을 놓아 멀리 날려 보내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에 '개울' 논쟁이 다시금 불거졌다. [4차 공방전] 아마도 이번에 네 번째 공방전인 것 같다. 정확히 세어보지 않아서 맞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림짐작이 그렇다. 시작은 달콤한 회상으로 출현했다. 기억은 다시금 그때의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갔고, 급기야 격정적인 논쟁으로 활활 타올랐다. 이번에도 짜라는 수비적이었고, K는 공격적이었다. K에게선 분명 정확한 맥만 짚으면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다는 확신 같은 게 비쳤다. 4차 공방전의 히든카드는 '도랑'이다. '수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도랑'이 더 적절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개울'은 적절한 단어선택이 아니라 강조한다. 짜라도 더 이상은 가볍지만 너무 진지하게 무거워져 버린 이 논쟁을 빗겨 갈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앞에 있는 컴퓨터로 각 단어의 사전적 의미들을 잡아낸다.
도랑: 매우 좁고 작은 개울.
개울: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 수로: 물이 흐르거나 물을 보내는 통로. 물길. 짜라가 찾은 단어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도랑은 작은 개울이고, 개울은 많은 수로들 중 하나이다. 도랑 < 개울 < 수로 수학으로 표헌하자면 이런 등식이 성립 할 것이다. 이것이 짜라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합을 할 수 있는 일반론으로 보였다. 하지만 K는 이런 설명에도 설득되거나 납득하지 않았다. 짜라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짜라가 모르는 그의 세계에서 '저 단어들'을 전문적 용어로 분류해 범위의 문제가 아닌 크기의 문제로 접근 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단지 짜라가 모를 뿐. 답답한 건 K가 아직도 자신의 확신이 상황에 따라서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격렬한 4차 공방전에서 K는 조금 낙담을 했다. 조금은 지친 듯한, 그래서 나른하고 자조적인 목소리로 타협을 제안해 왔다. 그렇게 불같이 타오른 4차 공방전은 비극적 결말에서 살짝 비껴날 수 있었다. 다음날. 그 전의 '개울'공방전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기억 저편을 더듬어 본다. 길을 찾고 있다. 어디로 가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동내 토박이 M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위치를 설명한다. 도심은 아니지만, 나름 번화하고 조경이 되어있는 실개천 근처에 서 있다. 지금 보이는 작고 인상적인 이 물줄기를 설명하면, M이 금방 이 위치를 떠올리리라는 기대로 작은 물줄기를 '개울'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그런데 M은 그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1차 공방전] 그 옆에서 전화하는 양을 경청하던 K는 '개울'이라는 단어에 코웃음을 친다. 그걸 '개울'이라고 설명하면 누가 알아 듣냐는 이야기다. '개울'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들먹여 가며, 작은 논쟁을 벌인다. K는 무작정 '개울'은 틀렸다고 단정 지은 후,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한참을 고심 끝에 '개울'을 대체할 선수로 '수로'라는 단어를 등용했다. 짜라 생각엔 '수로'는 '개울'의 넓은 의미로 들렸고, K는 두 단어 사이의 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짜라는 그런 사소한 걸로 휴가의 초반부를, 오늘 주어진 시간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 설명과 상관없이 원하던 것을 찾았다. [2차 공방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것을 음미하고 있다. 이런 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다시 '개울'로 돌아왔다. 짜라는 '개울'로 더 이상 어떤 논쟁도 하고 싶진 않았다. 가능하면 다른 이야기로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만큼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다시 그 폭풍 속으로 휘말리고 말았다. K는 약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개울'에 집착했고, 약간은 직업적 자존심을 어렴풋 바닥에 까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의 전문 분야에 아는 척 머리는 내미는 건 별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이겨봐야 얻을게 없는 그런 싸움에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집요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다각도로 접근하는 K를 보면서 그런 짜라의 소심한 배려는 이내 찌부러져 버려, 더 이상 붙잡고 있기엔 부끄럽고 무안해져 버렸다. 짜라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로 오늘을 마치고 싶지 않다고 직설적 화법을 사용했다. K는 논리적 언어로 짜라를 납득 시킬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몇 차례 시도를 하다 결국 포기하고, 짜라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어쩜 이 상황들은 동상이몽이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논리로 무장한 K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설명에 단어 선택에 혼란을 차치 한다면, 그의 주장은 완벽했다. 그런데 짜라의 관점에선 너무 허술하고 빈틈이 많았다. 어쩌면 그는 직업적 관용어에 익숙해져서, 전문용어 화 된 직업적 관용어를 일반적 언어에 일목요연하게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짜라는 그쪽 세계를 어렴풋 더듬을 뿐, 그 이상은 알 수 없으니 그냥 추측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개울' 공방전이 5차 까지 진행 되는 비극은 없었으면 한다. 미래에 있을지 모를 5차 공방전은 피바람이 부는 격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종말로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와 어둠에 칼날을 들이대겠지……. 그때의 그 사건들이 '개울' 공방전이란 추억으로 서로에게 경계석의 역할과, 서로를 감싸는 아련한 추억으로 얼굴에 미소를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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