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천년 후에는... 2012/03/15 짜라일기(독서일기) 견인도시 연대기 2편 사냥꾼의 현상금 | 필립 리브, 역:김희정 | 부키 | 2010-06-25 Predator's Gold (The Traction City Chronicles 2) | Philip Reeve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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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는 말이야, 죽은 대륙이야.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위대한 탐험가이자 탐정이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보가 1924년에 발견한 그 땅덩어리에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이 자리 잡았지만 60분 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지. 죽은 혼만 떠돌아다니는 붉은 사막과 오염된 늪지대, ……."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는 다는 지적 행동에서 생각이란 것을 내려놓고 기계적인 형식만을 유지하고 있다. 생각 없이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짜라의 머리는 하고 있다. 책을 읽고 있다고 하지만은 생각의 반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깨어나 지금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확인을 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추운날씨에 대한 생각도 있다. 보통 책이 가장 장 읽힐 때는 아무 잡다한 생각 없이 오로지 책의 내용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는 상태다. 그러나 그런 경우 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상념처럼 머릿속을 헤엄치다가 불쑥 불쑥 수면위로 뛰어올라 물위에 둥그런 동심원을 만들고 잔주름을 퍼트려 생각의 선로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탈선으로 이끌 때가 많다. 방금도 책을 읽긴 했지만 평면적인 의미 해석만을 하면서 지나갔는데, 아래쪽에 주석이 눈에 들어와 탈선한 생각에 브레이크를 잡아주었다. 주석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보가 1924년에 발견'했다는 부분이 잘못된 것이며 수천 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많은 부분 사실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전하고가 장치한 하나의 트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는 사실,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권위를 가진 역사라는 것이 어쩌면 잘못된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넌지시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짜라는 알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이야기라는 것을. 많은 책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정확한 것 도한 없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진리란 없다는 것이 진리다. 팔 네 개 달린 괴물들이 짜라를 보며 '팔이 두개밖에 없는 병신.'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딱히 변명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너희가 이상한 거다.'라고 말해 보아야 무엇하리. 진리가 없다고? 그럼 안 되는데, 왜냐하면 아주 곤란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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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짓 발짓으로 나를 구조해 준 사람들과 대화를 좀 할 수 있었는데 '기계 세탁 가능'이라는 여자하고 '12일 이내 배달'이라는 남자였어. 둘이서 탐험을 나섰다가 나를 발견한 것 같더군. 책일 읽는데 이번엔 걸어서 집으로 향하고 있다. 걷고 있는 동작을 관리하고 방향을 판단하고 길의 동선을 예측하면서 익숙하지만 항상 새로운 길을 걸으며 책을 읽고 있다. 여전히 생각은 책속으로만 파고들지 않았지만, 이번엔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작가의 장치를 살짝 알고 짜라의 생각은 '!'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다. '기계 세탁 가능'이라는 게 이름이라고, '12일 이내 배달' 도? 무슨 이름이 이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주석을 보니까, 아까와 비슷한 어조의 말이 나온다. 저자는 지금 시점에서는 의미를 가지던 단어들이 4000년 뒤에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멋져 보이는 단어들로 인식되어, 자식의 이름으로 차용하는 상황도 일어 날 수 있다는 다소 희화적인 설정을 하고 있다. 다소 무리는 있지만, 불가능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패션이라는 것에 '이성'이나 '논리'라는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직관'과 '느낌' 그리고 '상상' 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 할 수도 있듯이. 인터넷이라는 사이버-스페이스 에서는 여러 가지 별명을 보게 되는데, 듣보잡 같은 ID들이 난무한다. 3000년 전의 사람들이 이런 이름들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지금 책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보는 독자들과 같은 생각을 머리에 떠올릴 것 같다. S/F 라는 장르 소설은 완성도나 치밀함과는 별개로 독특함과 재치가 잔뜩 배어 있다. SF소설의 재미는 이야기 속에도 있지만, 그 형태에도 있다는 것이다. 형태적 재치라는 것을 너무 자주 읽으면 진부해지지만 가끔 읽으면 배꼽잡고 뒤집어 지듯이 재밌다. 이 글을 읽고있을 독자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본다. '기계 세탁 가능'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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